오늘은 독서일기 일종의 번외편이랄까.

 

문득, 서재를 정리하다가 낡은 페이퍼백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 본 책은 그때그때 중고 판매를 하든, 빌려주든, 누구에게 주든, 어떤 식으로 처분을 하는 편인데 그런데 이 낡은 책들은 어떻게 그 긴 세월 동안 내 책장에서 살아남았을까. 게다가 애당초 페이퍼백을 구매를 했다는 것은 오래 소장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가법게 읽고 떠나보낼 생각이 있었다는 건데 말이야.

 

그래서 이번에는 개별 책에 대한 후기가 아니라 내가 보유한, 내가 아끼는, 내 기억에 소중한 '페이퍼백' 책들에 대한 모듬 기록이다. 시간 역순으로 하나씩 들여다보자.

 

 

 

 

 

 

The Gone Girl

by Gillian Flynn

 

2015년 12월, 괌으로 떠난 휴가에서 정말 재밌게 잘 읽었던 책. 꼭 읽겠다는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떠나는 날 아침 인천공항에서 문득 구매했고, 덕분에 집에서 챙겨간 다른 책은 거의 펼쳐보지도 못했다.

 

책의 내용과 서술도 물론 훌륭하기 그지 없지만 (주저 없이 강추하는 바!) 난 이 책을 볼 때마다 괌 리프 호텔의 수영장 풍경, 뜨겁고 건조한 공기와 시원하고 찰랑한 물의 온도가 떠오른다. 휴가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한 책이기도 하고, 아주 바쁜 와중에 훌쩍 떠나면서 문득 산 책이어서 그런지, 그 당시의 정중동, hard-earned holiday,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이 모든 기억이 녹아있는 매개체인 셈.

 

이때를 계기로 다짐했지. 휴양지로 쉬는 여행을 떠날 때에는 공항에서 '떠나는 기분'을 담뿍 느끼며 이렇게 페이퍼백 소설을 한 권씩 사가겠다고. 그 책 한 권에 내 휴식을 온전히 녹여보겠노라고. 책이 만족스러우면 만족스러운대로, 좀 아쉬우면 '아하하, 이번 책은 뭐 좀 허술하네' 이렇게 어깨 으쓱하면서 맥주 한 모금 홀짝일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그렇게 느슨하게 즐길 수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언제 어디가 될지 모르는 다음 여행이 벌써 기대가 된다...

 

덧붙임. 이 책은 다 읽고 지인 나눔을 하려고 했는데 남편이 읽어보겠노라고 해서 킵. 읽기 시작하기까지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읽는 속도도 나에 비해서는 느릿한 남편인지라, 그가 이걸 읽게 되는 시점 또한 우리의 다음 해외 여행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The Great Gatsby

By F. Scott Fitzgerald

(Oxford World's Classics)

 

굳히 옥스포드 시리즈를 선호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이 표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여튼 수년 전에 우연히 구매한 게 바로 이 버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내 손때와 메모들이 가득해서 다른 어떤 멋진 하드커버 버전보다도 바로 이 책에 애착이 많이 간다.

 

내 생에 위대한 개츠비는 아마도 완독만 넛댓 번은 족히 한 것 같다. 그리고 (마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그랬듯이) 읽을 때마다 감상이 한 겹 한 겹 쌓여서 '아, 이 책은 정말이지 한 번 읽고 다 알 수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10대 때 처음 읽었을 때에는 '뭐야, 결국 유부녀가 된 옛 애인을 사모하다가 파멸로 치닫는 줄거리잖아' 하고서 적잖이 실망했던 기억도 있으니 원... ㅋ

 

이 책에 새삼스레 감명받았던 건 작년 봄, 출장 가는 길 비행기 안에서였다. (부피도 작고, 읽고 나서 시간 낭비했다는 생각도 안 들면서, 책장이 무겁지 않게 넘어가는 책이라서 출장용으로도 딱이다) 천천히 작품 속의 세계로 빠져들면서, 아 여기 기억난다, 그래 이렇게 이어지다가 내가 정말 좋아하는 묘사가 등장하지... 이렇게 기억을 되짚어가는 와중에 - 수년 전의 (몇 년 전인지도 모르겠다, 워낙 여러 번 읽은 책이라) 내가 똑같은 기분으로 형광펜으로 표시를 해둔 게 아닌가. 바로 지금 내 몰입도가 최고조인 바로 그 문장에, 그 표현에.

 

이야기의 화자인 닉의 시각을 따라가보는 것도 좋고, 저자인 피츠제럴드에 공감하는 것도 좋은데, 그 무엇보다도 감격스러운 건 바로 '이 책을 수년 전에 읽었던 그때의 나 자신과 교감'하는 것. 아, 역시 너도 나처럼 이 서술에 매료됐구나. 아마 몇 년 뒤의 나도 또다시 그럴 것 같아.

 

그리고 그 기억이, 감상이, 아울러 시간이 첩첩이 쌓이면서 이 책은 점점 나에게 불멸의 명작이 되어가는 거다. 나의, 위대한, 위대한 개츠비.

 

 

 

 

 

 

The Old Man and the Sea

By Ernest M. Hemingway

 

The Moon and Sixpence

by W. Somerset Maugham

 

왼쪽 페이지에는 영어 원문, 오른쪽에는 한국어 번역이 있어서 영어 교재의 고전이었던! YBM 시사 명작 시리즈! 그 중에서도 내가 꼽은 애착본은 (자그마치) 제1권인 노인과 바다, 그리고 '문장이 살아 숨쉬고 춤추는 듯한' 글의 매력을 일깨워준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

 

특히 노인과 바다는 20년은 족히 된지라 물 묻어서 쭈글쭈글해지고 커피인지 뭔지 얼룩도 묻어있고 책에서는 이제 거의 헌책방 냄새가 날 지경이지만, 이 대명작의 매력이 처음 내 마음 속에 격동쳤던 순간이 떠올라서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 (아울러, 이 줄거리에 꽤 실망했던 10대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ㅎㅎㅎ) 위대한 개츠비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헤밍웨이의 인생 역작인 노인과 바다 역시 여러 번 곱씹어보고 세월 속에 묵혀야만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작품 - 이런 걸 클래식, 명작이라고 하는 거겠지 - 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현재 30대인 나 역시 이 작품의 깊이와 농도를 제대로 아는 게 아닐 거라고도 생각해. 그러니까 두고 두고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소중히 보관해야지.

 

달과 6펜스는 초반에는 줄거리 진행이 꽤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다행히(?) 내가 이걸 한참 읽을 때 모옴의 문장에 흠뻑 빠져있을 때라 줄거리와 무관하게 충분히 빠져들 수 있었다. 그리고, 아, 정말이지 그의 출중한 문장력, 묘사력이라는 것이 폭발하는 후반부에서 느껴지는 그 전율은! 그 느낌을 만끽하기 위해서 일부러 중간 부분부터 시작해서 끝까지 완독한 게 한두 번이 아닐 정도다. 어쩌면 모옴의 작품에 매료된 나의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영향이 오늘날의 나를 어느 정도 만들었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Robot Dreams

Robot Visions

by Isaac Asimov

 

아이작 아시모프 로봇 시리즈의 열렬한 팬이었던 나의 10대 시절. 그때는 주로 도서관에서 대여해서 읽기는 했지만, 결국 소장해야겠다는 결론이 들었던 몇 권은 구매했지. 이거 말고도 파운데이션 시리즈도 전질 보유하고 있었는데 졸업 후에 학교 도서관에 기증했던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 당시에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란, 햇살 따스한 날에 창가에 앉아서 사과를 아삭아삭 먹으면서 아시모프 로봇 소설을 쌓아두고 읽는 것... 이었다는 거.

 

최근에 북클럽에서 테드 창의 소설을 읽으면서 SF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아시모프에 대한 거론이 있었는데, 덕분에 그 오래 전의 일들이 생각났지 뭐야. 아울러, 이 책들을 꺼내보다가 '기억의 페이퍼백' 포스팅을 써볼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이야, 반갑다. 10대 시절의 나.

 

 

 

 

 

 

Things Fall Apart

by Chinua Achebe

 

Animal Farm

By George Orwell

 

심지어 Things Fall Apart 는 학교 영어 수업 교재였어... 그런데 나름 인생작 중 하나라서 당시 학기 중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수차례 읽었던 작품이다. 덕분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원어민들을 제치고 영어 시험 성적이 늘 최상위권이었던 듯-_- 역시 세상에 덕력을 이길 덕목은 없는 거다...

 

동물농장은 95-96년도 부근에 하연찡이 선물해준 책이다. 심지어 책 뒷면에 Hayon 이라고 스티커가 붙어있음 ㅋㅋㅋ 아, 뭐죠, 우리 10대 때 주고 받은 선물이 지성미 넘치네효 ㅋㅋㅋㅋㅋㅋㅋ 이것도 엄청 낡았는데 그 노후하고 지친 분위기가 왠지 작품이랑도 잘 어울려서 계속 보유 중. 동물농장은 매끈한 새 책으로 보면 이제 어색할 것 같아...

 

 

 

 

 

 

이번 포스팅의 백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들!

 

심지어 한 권은 프랑스어, 두 권은 (그것도 동일한 버전의) 영어판이다. 프랑스어 버전은 내가 초등학생 때 (와우) 읽던 거고, 영어 버전 중 조금 낡은 쪽이 대학생 땐가 구매한 거고, 이거 잃어버린 줄 알고 한 권 더 사서... 그리하여 총 3권.

 

앨리스는 작품 속에서 '영국 아이가 불어를 구사하는' 상항에서 발생하는 언어 유희가 꽤 있는데, 난 애당초 프랑스어로 읽는 바람에 이 부분들에서는 각주를 열심히 찾아봤던 기억이 난다. 아울러 존 테니엘 삽화 특유의 고전적이고도 냉소적인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의 이질감도 기억해.

 

 

 

 

 

 

Le Petit Prince

By Antoine de Saint-Exupery

 

이건 대체 언제 구매했더라... 만약 프랑스에서 구매했던 거라면 엄청 오래된 건데 이렇게 책이 비교적 멀쩡할 리가 없고, 그렇다고 내가 한국에 돌아와서 굳이 이걸 샀던 기억도 없고... 아, 그런데 책의 출판사와 형식을 보니 (프랑스에서 구매한 게 확실한) 앨리스와 동일 버전이다. 세상에, 그렇다면 이 책도 최소한 20년은 됐다는 건데 ㄷㄷㄷ

 

어린 왕자야 뭐 워낙 전세계적 베스트셀러인 데다가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독 인기가 많은 작품이지만, 나에게 지니는 의미는 좀 더 특별하다.

 

내가 아직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할 때, 학교에서 이 책을 오디오북 교재로 채택한 적이 있었다. 내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아직 낯선 언어로 이 작품을 처음 만났다. 잘 모르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언뜻 들리는 언어의 실마리. 마치 청각적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뎌가면서 더듬더듬 길을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나중에 (오디오에 비해서 찬찬히 꼼꼼히 읽어볼 수 있는) 활자로 작품을 다시 돌아봤을 때에는 그야말로 개안(!)하는 기분이었고! 그렇게 본의 아니게 공감각적으로 작품을 대한 탓에 뇌리에 깊숙히 박혀서 이제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기억이 된, 어린 왕자.

 

 

 

 

 

 

 

같은 출판사, 같은 컬렉션 출신(?)의 어린 왕자와 앨리스! 둘 다 표지 디자인 표맷이 동일하고, 책 뒷표지를 보면 거꾸로 뒤집어서 볼 수 있는 일종의 부록이 수록되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산 비슷한 책인데 왜 앨리스만 이렇게 낡았는지는 나도 의문이다. 여튼 투명 테이프를 붙여가면서 계속 소장하고 보고 싶어했음이 느껴지는군.

 

 

 

 

... 그러고 보니, 뭔가 감개무량한 포스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