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럽다, 는 것.

Posted by 배자몽 일상잡기록 : 2017. 5. 23. 23:19

 

 

 

하루가 다르게 더워지는 날씨,

얼굴과 두피와 손발에 차오르는 열,

여전히 바쁘며 한동안도 그럴 것으로 보이는 일.

 

'싱그럽다' 라는 단어와는

당최 어울리지 않는 일상의 모습들이다.

 

그럼에도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저 단어가 머리 속을 계속 팔랑팔랑 감돌더라.

 

집에 들어오자마자 수건 빨래를 세탁 돌려놓고

풍선껌 같은 향의 마쉐리 에어필 샴푸로 머리를 감고

시원하게 샤워를 마치고, 각질 제거와 수분팩도 하고,

좋아하는 보송한 소재의 여름 잠옷을 입고 앉아서 -

오늘 스쳐갔던, 좋았던 기분을 끄작끄작 남겨본다 :)

 

 

 

 

 

딱히 점심 약속이 없던 오늘,

점심은 대강 때우고 낮잠을 좀 잘까,

아니면 좀 촉박해도 운동을 다녀올까,

에이 그냥 일이나 바짝 하고 오후에 쉴까,

이러고 있던 차에 반가운 벙개가 생겼다.

 

밥은 간단히, 후식은 여유롭게,

라는 모토조차 참 마음에 들었던 점심.

 

그러고 보니 삼청동을 늘상 드나들면서도

이니스프리 제주하우스에는 가보질 않았네.

 

판교는 멀고, 제주도는 요원하니,

언젠가 쉬는 날에 명동점이나 가볼까,

아, 하지만 관광객 바글거리는 명동 별로인데.

 

이러면서도 가장 가까이 있는 삼청점은, 음,

이상하게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못 해봤다.

그러니까, 그 스토어가 거기에 있는 건 알지만

'내가 놀러갈 곳'으로 인지해보질 못했달까.

 

마치, 매년 피는 여의도 벚꽃 같은 거다.

업무 환경 주변에 있어서 쉽사리 볼 수 있지만

너무 업무처에 있는 거라서 되려 무심해지는,

일부러 찾아갈 마음은 좀처럼 들지 않는 것.

 

생각보다도 더 널찍하고

상상보다도 더 쾌적하고

기대보다도 더 고요해서

 

오후 내내 3층 창가 자리에 앉아서

퐁신한 핫케이크나 한입씩 먹으면서

음악 듣고 책이나 보고 싶었... 지만,

 

그게 가능할 리는 없으니까!

음료수라도 상큼하고 예쁜 걸로 마셔보자.

 

블루베리 민트... 뭐였더라. 에이드겠지.

탄산수와 얼음, 좋아하는 과일청에 블루베리.

간단한 재료로 쉽게 만들 수 있는 음료이지만

아마 한동안 이 장면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아.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망중한의 햇살에

투명하게 빛나는, 길쭉한 유리잔과 얼음.

맑게 동동 떠있는 블루베리와 민트잎.

 

 

 

 

 

업무로 가득찬 오후 시간을 보내고 나니

우산도 없는데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흠, 이거 뭐 금방 그칠 것 같지도 않은데

비가 잦아들 때까지 운동이나 하고 갈까.

 

그렇게 개운하게 땀을 흘리고 대강 씻고

짐을 주섬주섬 챙겨서 나서려고 하는데,

비는 계속 온다. 택시를 불러야 하나.

하지만 아무리 호출을 해도 답이 없다.

 

어쩌지, 음.

더 시도해볼까, 뛰어라도 가볼까.

그냥 아까 이른 시간에 나설 걸 그랬나.

 

고민하다가 에라이 싶어서 발길을 뗐는데,

허무하리만치 옅은, 끝나가는 빗줄기였다.

 

뭐야, 촉촉하고 시원하고 좋기만 하네.

 

기분 내킨 김에 어디 카페에라도 들어갈까.

아니야, 내일도 일정 많은데 집에나 가자.

그렇다면 메밀국수나 한 판 하고 가는 건?

 

언제나 손님이 가득한 시청역 미진이지만

거의 영업 끝나가는 시간에는 그저 한산하다.

평소에는 얼굴 보기 쉽지 않은 사장님도

친절하게 안내를 하고 말을 걸어주신다.

부엌의 달그락 달그락 소리도 평화롭다.

바쁜 시간의 부산스러움과는 사뭇 다른.

 

방금 데쳐서 식혀나온 메밀면이 어쩐지

유독 촉촉하고 시원하고 탱글해보이네.

 

 

 

 

 

오늘 귀가 시간에 이렇게 여유를 부린 건,

별다른 약속이 없는 탓도 있었겠지만,

이번 주에 남편의 출장 탓도 있을 거다.

 

'어차피 남편도 없는데 운동하고 들어갈까'

'어차피 집에서 같이 저녁 먹을 거 아닌데

밖에서 뭐라도 간단하게 먹고 들어갈까'

 

물론,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다.

일 빨리 마치고 돌아왔으면 싶고.

 

그런데,

떨어져 있는 시간도

제법 잘 보내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그 또한 행복하다.

 

바쁘다고 해서 서로 무심한 것도 아니고,

서로의 부재가 해방으로 느껴지는 것도 아니건만,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각자의 노선을 따라서 잘 가고 있다는 것이,

따로, 혹은 같이, 어느 쪽이든 조화롭다는 것이,

내 마음을 굉장히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보고 싶지만,

함께 있으면 좋지만,

안달이 나거나 불안하지는 않다.

 

나는 나만으로도 족하다.

그런데 이런 내 삶에 당신이 있어서 더 좋다.

 

그런 독립적인 '내'

'당신'과 함께 하는,

우리의 일상이

난 정말, 정말이지 좋다.

 

그러니까, 컴백홈- ㅎㅎㅎ

 

참, 이 마지막 사진은 이러한 기분을 느끼면서

집에 들어오는 길, 비 내린 후의 개운한 공기,

바쁜 주중 밤 시간의 올림픽 대로의 야경,

이런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찍은 샷.

 

그러니까,

오늘 이 글의 마지막 '싱그러움'

 

 

 

2017년 5월 23일

마음과 시선이 봉하마을을 향하던 날.